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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권

    2015.04.06 약 23.4만자 3,500원

  • 완결 2권

    2015.04.06 약 22.3만자 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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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자신을 살리는 대신 한쪽 다리를 잃게 된 은인의 딸을 운명처럼 사랑하게 된 산하.
그는 어린 나이에도 운명처럼, 책임처럼 그렇게 작고 여린 유린을 신앙처럼 받아들였고 기꺼이 아이의 보호자가 되었다.
여기 저기 휘둘려 모든 것이 두려웠던 어린 소녀 유린, 아버지를 따라간 곳엔 온통 무서운 사람들 뿐, 힘없는 아버지를 대신에 그녀를 지켜주는 이는 세상 유일무이 한 사람 이산하 뿐 이었다. 새끼오리처럼 졸졸 산하를 따르는 유린, 그렇게 유린에게 산하의 존재는 어머니와도 같았고, 아니 그 이상이 되었다.
그들의 투명한 사랑이 천천히 포개지고, 완전해 질 즈음 폭풍처럼 들이닥친 절망이 있었으니, 지금 여기, 하나를 잃으면 모두를 잃고 하나를 얻으면 모두를 얻는 이들이 있다.
한 여자를 위해 모든 삶을 바친 산하. 그는 그녀를 잃은 줄 알았던 그 순간까지도 끝내 그녀를 놓지 못했다.
그가 없이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 유린, 그녀는 그를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를 지켜야 하는 법을 깨닫고 만다. 그녀의 선택은 바로 죽은 삶, 자신의 죽은 삶이 그에게 가 삶이 된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딸을 살리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삶, 그리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모두를 없애야만 했던 어머니의 잔혹한 삶, 이 장난과도 같은 기막힌 운명 속에 선택의 여지도 없이 휘말려야만 했던 가여운 연인.
그들은 모두 같은 이름 다른 마음으로 제 사람을 위하고 있었다.
그것은 과연 유죄일까?
아님 무죄일까?
과연 이들은 그 폭풍 같은 처절한 운명을 어떻게 뚫고 헤쳐 나갈 것인가.
지금 여기, 시리도록 안타까운 연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본문 중에서-

곪아 터진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산하는 용서한다고 했다. 이해한다고 했다. 유린을 더 이상은 잃을 수 없다며 뭐든 다 받아들이고 감수하겠다고 했다. 성욱은 너무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산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유린을 일으켜 세웠다.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유린이 오열과 충격으로 감당이 안 되어 탈진을 하자 산하가 유린을 조심히 업고서 경현을 노려보았다.
“아버지, 저한테 어머니는…….”
경현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산하를 바라보았다. 비참함, 처절함, 어머니에게 남은 건 이제 그 뿐이었다.
“이제 없습니다.”
“산하야! 이 녀석아.”
강재가 산하에게 한 발 다가서며 타이르듯 말하자, 산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가 인정 안 해주시면, 저는 이제 아버지도 없습니다.”
성욱의 허탈한 눈빛과 산하의 텅 빈 눈빛이 동시에 마주쳤다.
“더 이상 아저씨도 자식을 위한다는 핑계로 제게서 유린이를 빼앗아 가진 못하세요.”
유린이 산하의 등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산하는 기진맥진한 유린을 업고서 허무하게 남겨진 그들의 눈을 한 번씩 차갑게 훑어보았다.
“산하야.”
경현이 한 발짝 다가가 산하에게 손을 뻗자 산하가 차갑게 외면했다.
“이제 그 누구의 말씀도 듣지 않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걱정도 말고 위하지도 말고 애쓰지 마십시오. 여기 계신 누구도 저흴 위해 그러실 자격 없으세요. 저희를 위해 그러셨다고요? 그래요. 그래서 어떤가요? 지금 저희 꼴을 좀 보세요!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가장 상처 받고 망가진 게 누구 같아 보이세요? 네? 아무도!”
산하가 경현을 노려보았다.
“그 누구의 관심도 사양합니다. 비뚤어진 관심은 집착일 뿐입니다.”
산하가 아픈 눈으로 성욱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비겁하게 피하지도 마십시오. 만일, 또 도망치듯 숨어 버리면 그게 어디든 죽음 앞까지도 따라갈 작정이니까요.”
“산하야. 이놈아.”
강재가 안타까운 눈으로 산하의 벌벌 떨리는 마지막 절규를 지켜보다 안쓰러워 아들을 불러 세우자 산하가 이번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방치와 방관. 그것이 제일 나쁘죠. 제일 비겁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멀쩡한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아버지.”
그렁그렁한 산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산하의 등 뒤에서 유린이 손을 뻗어 그의 눈가에 눈물을 닦아 주었다. 산하가 유린을 바로 업고서 등을 돌렸다. 그들은 드디어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 했던 그 집안에서 거칠게 현관문을 열고서 빠져나왔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등에 꼭 붙어 있는 산하의 유일한 삶의 이유, 유린을 데리고서 말이다. 끔찍한 지옥 속에서 유린을 구한 사람은, 아버지도, 레오도 아닌 산하였다. 유일하게 그녀를 지켜주고, 온전하게 데려 나올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이산하였다.


[미리보기]

프롤로그 - all for you


컴컴한 적빛 조명을 따라 움직이는 발걸음, 또깍, 또깍, 또깍, 또깍, 휘어질듯 가는 굽이 아슬아슬한 바닥을 딛고 걷는다. 부러질 것 같은 발목, 늘씬하고 매끈한 다리가 용케도 어울리는 빨간 구두는 앞코 가죽에 조명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누가 봐도 단정한 블랙 투피스로 주름 한 점 없이 하루를 버텼다. 한 올도 흘러내리지 않은 머리카락은 단단히 당겨져 동그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윤기 나는 낯빛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촉촉이 담고 있었다. 더할 수 없는 콧대로 사람들의 시선을 단박에 붙잡아 버린다. 당당한 콧대는 건방지지도, 또 비굴하지도 않았으니 그보다 더 매력적일 수는 없으리. 시리도록 맑은 눈빛의 이 여자는 누구라도 마주하면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은 깊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함부로 희망할 수도, 또 쉽게 포기할 수도 없게 만드는 이 여자. 이 이상한 여자. 참으로 신비스런 이 여자.

그녀가 지나가는 자리에 시선을 빼앗기는 사내들,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귀가 멎을 지경이다. 개중에는 입을 벌리고 서서 당당히 시선을 주기도 하고, 혹자는 힐끔거리며 그녀의 동선을 좇기도 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한 이 여자, 이 사랑스러운 여자는,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제 할 일만 하고 있다.
“아흐. 미치겠다. 저 여자 진짜 눈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네. 좀 봐봐. 인마 너도!”
부산을 떨며 여자의 뒤를 기웃거리던 개중에 한 명이 마침 동석한 친구에게 턱짓을 했지만, 허나 이 남자 와인 잔에 눈빛을 박고 좀처럼 흔들릴 줄 모른다. 친구의 농에 웃을 법도 한데, 가볍게 웃을 줄도 모르는 이 재미없는 남자의 손가락에 매달려 있는 와인이, 출렁, 출렁, 출렁, 출렁, 수선을 떠는 친구의 눈빛과는 또 다른 의미로 몹시 흔들리고 있다.
“야! 인마, 저런 여자들은 봐줘야 예의야. 저 존재만으로도 안으로는 기쁨이요, 밖으로 나아가 길이길이 빛낼 애국자 아니냐? 국위선양을 저절로 하고 있는 축복받은 유전자들이란 말이지. 저런 여자들이 해외 나가서 ‘웨 월 아 유 프롬’ 그러면 ‘호호 아임 프롬 코리아’ 요래 주면서 우리나라 주가 팍팍 올려주시는 거거든. 아! 나 이런. 이 예의 없는 자식도 내 친구라고.”
친구의 농에 내내 떨어졌던 남자의 시선이 허공을 가른다. 그러나 여자가 아닌 친구에게 시선을 주는 이 남자. 이 남자의 눈빛은 또 어떠한가.

담담한 듯 포장했지만 사실 허울에 가려진 속 빈 강정이다. 그것은 어쩌면, 차갑다 아니 시리다. 그리고 분노와 인내를 동시에 담고 있다. 누구라도 마주하면 흠칫 놀라게 되는 싸늘함. 공격적인 눈빛은 분노를 억누르는 듯 아슬아슬하고 어느 것 하나 쉽게 통과되는 법이 없다. 주고받음 역시 없다. 받아들이지도 허락하지도, 이해하지도 않겠다는 칼같이 떨어지는 매서운 눈빛은 한마디도 쉽게 섞지 않겠다는 굳게 다물린 입과 짝을 이루고 있다. 단단한 가슴, 넓은 어깨, 다부진 몸매는 미남형 얼굴과는 대조를 이루고 그나마 어울리는 한 가지가 있다면 길고 곧은 손가락 정도랄까? 반듯한 블랙 슈트에 갈색 구두를 신은 그의 앞코에도 조명에 비친 와인이 투영되어 출렁이고 있었다. 그 싸늘한 눈빛에 흠칫 놀란 친구가 고개를 흔든다.
“거 자식.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인마, 이제 벗어날 때도 됐잖아. 아오. 이 지독한 자식. 무서워서 뭔 말을 하겠냐?”
오랜 시간 봐왔던 친구마저도 흠칫거리게 만드는 눈빛, 참으로 익숙해지지 않는 매몰찬 눈빛에 친구의 표정이 절로 수그려지자 이 남자 또 습관처럼 미간에 주름을 만든다. 절로 써지는 인상. 친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일어선 남자의 돌아섬에는 망설임이 없다. 화들짝 놀란 친구가 남자의 팔을 서둘러 붙잡았다.
“야. 야. 알았어. 인마. 입 꼭 다물고 있을게. 봐 인마. 지퍼 채웠다고. 와인이나 마시자. 그러자고. 어? 앉아 앉으라고.”
“화장실.”
인상을 펴며 용케 마음을 자르고는 이 남자, 친구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는 듯 간단하게 답했다. 자리를 박차고 화장실로 걸어가는 남자의 실루엣은 눈이 부셨다. 들어섰을 때부터 흘끔거리던 여자들의 시선이 한순간 이 남자에게로 몰린다. 앉아 있을 때 궁금했던 그가 막상 일어서니 이제야 완성된 그림이 되어 여자들로 하여금 황홀한 미소를 선물하고 있다. 화장실을 가는 남자의 뒤 쪽으로 바 안에 있는 여자들의 시선이 너도 나도 틈 없이 붙어 남은 자리 하나 없다. 친구 녀석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 자슥! 성깔 하고는, 질린다. 질려.”
불편한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남자의 걸음이 무겁다. 남자는 그리웠다. 와인이 아니, 와인을 마시던 그녀가 아니, 와인을 좋아하던 그녀가. 불편한 시선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그 뿐이었다.

한숨마저도 맘껏 터져 나오지 못했던 지난 날. 그 모든 감정의 고리는 단 하나, 오직 하나의 이유뿐이었다. 누가 봐도 훌륭하고 애국을 절로 하게 되는 미모라 할지언정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국위선양을 할 정도의 수려한 이성이라 해도 그의 눈에 찰 리 없다. 이변이 없는 한 적어도 그에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일은 없을 일이었다. 죽었던 그녀가 살아 돌아온다면야 모를까!
한층 더 어두워진 남자의 표정이 무겁게 그림자를 만든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가 얼굴에 묻어 버리자 조금은 살 것 같다. 벌. 벌을 받는다. 제 여자를 지키지 못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약한 남자의 형벌은 분명 유죄이며 또한 무기징역감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그는 그만 고개를 흔들어 버린다.
“휴.”
맞다. 따라 죽을 용기도 없다. 아니 따라 죽을 면목도 없다는 게 맞는 말이다. 남자는 대충 손을 닦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또깍, 또깍 신경을 거슬리는 여자의 발자국 소리에 시선을 든다.
“하!”
남자의 발걸음이 마주 오는 그 소리에 얼어붙었다. 또깍. 또깍.
“……!”
남자의 속이 몹시 출렁인다. 그리고는 아주 오랜만에 이 남자의 가슴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출렁이는 속이 미친 듯 요동을 치고 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충격, 또깍, 점점 커지는 그녀의 빨간 구두 굽 소리. 또깍, 남자의 손이 망설임 없이 뻗어나가 여자의 팔을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또 적막, 믿을 수 없어 미친 듯이 흔들리는 남자의 눈동자와, 시리도록 맑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자의 눈동자가 마침내 만나고야 말았다.
“너, 너!”
마침내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을, 아니 움직이게 하는 여자를, 아니 이 남자 마음의 유일한 주인을 찾아 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 눈을 의심하듯 깜빡이는 눈동자가 순식간에 빨개져 왔다.
“네가 어떻게.”
“아니, 아니에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무겁게 매달고 있는 이 여자. 밑도 끝도 없이 아니란다.
“하! 뭐. 뭐가 아닌데?”
거세지는 남자의 추궁에 여자가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실례지만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차마 눈도 마주하지 못하는 이 여자, 간신히 말을 토해내지만 그것은 남자를 더 자극할 뿐이었다.
“뭐가 아니냐고?”
속이 타들어간 남자의 입에서 이내 고함이 터져 나왔고 여자는 예상했듯 아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 남자, 다시 한 번 여자의 어깨를 돌려 세워 제 눈으로 확인했다.
“하! 믿을 수가 없어. 지금 내가 꿈을 꾸나? 이건 꿈이 아니야. 꿈일 리가 없어.”
‘꿈이면 절대……안 돼.’
여자의 시선이 남자의 불안한 눈빛을 가만히 쓸어 담았다. 그러자 더듬거리는 남자의 손길이 여자의 목을 끌어당겨 깊게, 뜨겁게, 강하게 안아 버렸다. 마치 다시는 도망칠 수 없도록, 여자를 안은 남자의 두 팔에 더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뚫어질 듯 서로를 탐하던 두 눈빛이 이제야 해방이 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스르르 감겼다.
“하! 유린아. 이건 진짜야. 꿈이 아니야. 그렇지?”
힘없이 떨어진 여자의 손이 힘겹게 남자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힘차게 밀어낸 그녀의 손짓에 남자는 허무하게도 밀려갔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의 당황스러움에 떠밀려진 눈빛이었다.
“꿈……이에요.”
아픈 여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어졌다.
“아니야!”
남자는 인정하고 싶음에 애가 타는데, 여자는 부정하려고만 든다. 남자는 이 순간 도저히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죽었던 여자가 꿈처럼 살아 돌아왔다. 단 한 번, 꼭 한 번만 볼 수 있기를, 꿈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 오직 그 한 가지만이 그에게 남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감정이었다. 그리움, 그 마음만 남겨두고 모든 감정을 버리고 살았다. 남자는 고개를 흔들며 또 한 번 쩌렁쩌렁 소리를 치고 말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러나 이번엔 여자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꿈이 아니라면, 꿈을 꿨다 생각하고 잊어요!”
매몰차게 딱 끊어내는 여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매몰찬 여자의 대답에 이 남자,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버렸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그 꿈을 깨주겠어.”
단박에 싸늘해진 눈빛은 주저 없이 여자가 들고 있는 와인 병을 바닥에 집어 던져 산산이 깨트려 버렸다. 과격한 행동에 놀랄 법도 한데, 여자는 그저 바들거리는 입술만 깨물고 있을 뿐 다른 반응이 없다. 그리고 이 남자, 이 무모한 남자는 대책도 없이 깨진 유리 조각 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물론 흔들리는 여자의 눈빛을 놓치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하! 안 돼…….”
마침내 확인! 이 남자의 얼굴에 얄궂은 미소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린다. 차마 볼 수 없음이리라. 유리가 박힌 남자의 주먹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지자, 여자의 시선을 가리고 있던 손이 서서히 거두어졌다. 차마 볼 수 없을지라도 오래 안 보기엔 너무 마음이 아팠던 탓이라. 뚝뚝 피가 떨어지는 주먹을 쥔 채로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는 이 남자. 그 핏물이 여자의 가슴을 두드려 눈물과 함께 떨어졌다.
천천히 남자에게로 다가가 그의 넥타이를 끌러내는 여자의 손길에도 망설임은 없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타이로 단단히 고정해 지혈을 시켜 주었다. 아무 말도 없이 여자가 하는 양을 그대로 두고 보고만 있던 남은 다른 한 손을 서서히 들어 여자의 소리 없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기어코 상처를 내 피를 보고만 남자의 무모한 행동치고는 한층 안정된 표정이었다. 그것은 이제야 실감을 한다는, 절대로 꿈이 아님을 증명해냈다는 어떤 무모한 표현이었다. 눈물을 닦아낸 남자의 손이 부드럽게 뺨을 스치고 내려와 여자의 입술을 건드리자, 여자의 눈에서 더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남자의 눈빛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자 여자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 눈을 차마 더는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남김없이 내려두고 그저 그 가슴으로 뛰어들게 될까봐. 그래 버리고 말까봐 여자는 겁이 났다.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여자의 눈가로 내려앉았다. 여자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따라 남자의 입술도 함께 움직였다. 부드러운 입맞춤은, 마치 아기를 다루는 듯 했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로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제 떨림이 그에게 느껴질까,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남자가 그녀를 보기위해 잠시 떨어졌다. 여자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꼼짝없이 서 있다. 무턱대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작은 입술을 삼켜버렸다. 눈을 감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은 영락없는 남자의 여자였다. 손으로 만지고 숨결을 느꼈어도 믿어지지 않는 순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 남자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그러나 여자의 볼을 다시 한 번 쓰다듬으며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안정돼 있었다. 그것은 초콜릿보다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이렇게 생생한데, 하! 이렇게 생생한데.”
남자의 손이 이번엔 강하게 여자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이걸, 이것도 꿈이라고 말할 셈이야?”
힘없이 남자에게 끌려간 여자가, 작은 반항조차 하지 않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알던 주유린은 이제…….”
남자의 심장이 멈췄다.
“없어.”
“뭐?”
“그러니까, 이거 놔요.”
남자의 팔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또깍, 또깍, 여자의 발자국 소리가 또다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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