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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권

    2016.11.09 약 27.1만자 4,000원

  • 완결 2권

    2016.11.09 약 25.5만자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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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위태로운 정세 속에 스스로의 왕재를 감추는 것만이 목숨을 부지하는 유일한 방도였던 조선의 왕세손 이정.
세손의 호위 무사가 된 오라버니를 만나기 위해 궐에 든 제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낭자의 이름이 무엇이오?”
“제인이라 합니다.”
“제…… 인.”

스스로의 처지를 경멸하는 정은 차마 제인에게 제 이름조차 떳떳히 밝히지 못하고, 그런 정에게 제인은 어둠 속 등불마냥 환한 빛이 되어 다가오는데…… .


“세손저하께서는 사실.. 몹시 추남이시라오. 그 뿐인 줄 아오? 등은 노파처럼 굽었고, 그 얼굴엔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하지. 키는 땅딸막하고 머리까지 나쁘시다오.”

""나으리 말마따나 그 분의 등이 굽으셨다면, 그는 누구보다 살뜰히 백성을 굽어볼 줄 아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자글한 주름이 가득하시다면, 그것은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키가 땅딸막하고 머리가 나쁘시다면 그런 체구로 검술을 익히시고, 학문의 수재 소리를 들으시기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력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비가 죽음을 맞은 그날 이후 처음으로, 정은 제인을 통해 살아남아야 할 진정한 이유를 찾았다.

""왕께서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정사를 펼치신다면, 어리석은 신하는 등을 돌릴지언정 백성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훤칠한 키와 너른 어깨 위에 수려한 용모가 들어차 그것이 보기 좋게 휘면서 아름다운 미소를 그려 내니, 못내 훔쳐보던 제인의 두 뺨이 절로 붉어지는 탓에 제인은 그것을 숨기기 급급하여 그저 고개를 수그릴 뿐이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국화 밭을 지나 정과 제인, 그리고 연못을 두루 훑으며 지났다. 정이 팔을 뻗어 철릭 소매로 제인의 가녀린 전신을 바람에게서 숨겨 주었다. 제인의 턱 언저리에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고 정은 깊은 눈매로 제인의 고운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낭자의 이름이 무엇이오?”
“제인이라 합니다.”
“제…… 인.”
제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나직한 목소리로 곱씹는다. 비 갠 뒤 비로소 드러나는 옥색의 빛이라…….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의 인연으로 묶인 그 찰나의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었다. 오가는 눈길 속에는 두 사람의 설레는 마음을 대신한 수많은 말들이 담겨 있었다. 젊고 수려한 사내가 젊고 고운 여인에게 이끌리는 것은 해가 저물고 다시 달이 차오르는 것과 같은, 경이로운 자연의 이치였다. 마찬가지로 제인 또한 정에게로 향하기 시작하는 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 ……전하아! ……세손 전하……!”
그때였다. 저쪽 궁궐의 담장 너머로 내관의 검은 관모가 불쑥 솟아올랐다. 이리저리 갸웃 거리던 관모가 정과 제인이 있는 후원을 향해 점차 가까워졌다. 구 내관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정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웃전에 저녁 문안을 드릴 시각까지 정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가장 먼저 경을 칠 것은 정을 상시 보필하는 구 내관일 것이 분명했다.
정은 사정 모른 채 말간 얼굴로 선 제인을 돌아보았다. 날이 어둑해지자 기온이 떨어져 한기를 느끼는지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각 제성을 기다리느라 밖에서 속절없이 찬바람을 맞았으니, 이대로 두었다간 크게 고뿔이 들지도 몰랐다. 정은 아쉬운 마음을 접고 이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늦어지는 듯하니, 내가 가서 제성을 불러오겠소.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시오.”
“저…….”
등 돌려 멀어지려 하는 정의 옷자락을 제인이 다급히 붙잡았다. 그러자 제인을 돌아본 정이 도리어 그 작은 손을 붙들어 제 입가로 가져가는 것이다. 곧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에 ‘하아’ 하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그의 뜨거운 입김이 손등으로 쏟아지는 순간, 가슴이 미친 듯 두방망이질치는 바람에, 제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사라져 가는 정을 두 번 붙잡진 못했다.
저쪽으로 달려간 정이 이윽고 궐 담 뒤로 모습을 감추었고, 제인은 아직까지 온기가 미약하게 남은 제 손을 아쉬운 얼굴로 내려다보다, 그것을 가슴 위로 가져가 가만히 그러안았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아쉬운 물음은 허방에 조용히 흘려보냈다.
“나으리의 함자는 어찌 되시는지요…….”
지나는 바람이 갈 길 잃은 제인의 아련한 음색을 잡아채 국화 밭 위로 희미하게 흩뿌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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