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비워진 뜰에 헌과 영서 둘이 남았다. 노을마저 자리를 비우고 이른 저녁 마른하늘에 번쩍 불이 오르고 쿠우웅 천둥이 울렸다. 침묵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 영서의 치마가 날렸다.
툭. 투욱….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영서 치마에 점점이 얼룩을 그렸다.
“따라와!”
헌은 그 밤이 시작되었던 연못가 정각으로 영서를 불러들였다.
영서와 헌은 한동안 말없이 뜸뜸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연못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머니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너를 원했고 널 담은 내 마음은 네게 그리 아무것도 아닌 것이냐?”
“전하, 저는 박복하지만 불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마음이 못되게 생겨 저를 넘어선 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알아듣게 말해!”
영서가 헌을 향해 돌아섰다.
“전하. 저는 전하의 곁에서 전하만 보며 저를 낮추고 주변의 모든 모멸의 눈초리와 제게는 부당할 수 있는 법도를 따르며 살 수는 없다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요는 너에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참아 줄 만큼은 아니라는 것이구나.”
“물어보십시오, 전하. 전하께 저 또한 이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참아 줄 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헌이 갑자기 웃긴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웃음을 멈추고 헌은 자신의 것이어야만 하는 여인을 보았다.
“못된 것!”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긴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녀에게는 딱히 잘못이라 꼬집을 만한 것은 없었다. 무력이나 완력으로 그녀를 갖고자 했다면 왕인 자신이 이리 힘들게 온갖 명분을 붙여 교묘하게 청이전에 붙들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전히 그녀를 얻고 싶었다. 사내로서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헌은 그녀에게 그런 사내가 되고 싶었다. 밤을 함께하고 이리 절절하게 바라보면서도 아니라고 하니. 허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이 여인에게 정을 구걸하는 치졸한 사내이고 싶지는 않았다.